오랜만에 바나나를 읽었다. 대학에 있을 무렵, 전철에서 신작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 그리운 마음에 샀다가 다 읽지 못한 <막다른 골목의 추억> 단편집이었다. 딱히 연인도 뭣도 아닌 두 사람이 어쩌다보니 착실하게 시간을 쌓아가는 그런 이야기로, 대게는 이렇다 할 결말 없이 '그 나날을 품고 살아갑니다' 로 끝났다. 그 아무래도 좋은 느낌이 무척 편안해서 푹 빠져 읽었다. 최근에는 짧은 글의 호흡에 익숙해져 책 한 권을 다 읽기가 힘겨웠지만, 슬렁슬렁 읽다보니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있었다. 여전히 유령이라던지, 예기치 못한 운명적인 불행이라던지, 도저히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이상적인 관계가 소재로 등장하고 있어서, 어렸을 때 좋아했던 만화 영화를 커서 다시 보는 것 같은 재미도 있었다.
강이란 참 신비로운 것이어서, 언제나 오싹할 정도의 공포를 은닉하고 있다. 화창한 날이면 찰랑찰랑 흐르고 반짝이는 햇살을 받아 물가에 핀 온갖 식물의 초록이 도드라져도, 왜인지 시커멓고 깊고 오싹한 어떤 것과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략) 그때, 강이 있는 도시에 내가 얼마나 쉬 녹아드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강의 흐름을 보는 것과 똑같다는 것도 알았다. 그곳은 반드시 역사가 있는 도시여야 한다. 오래되고 무겁고 섬뜩한 색깔과 형태의 건물 앞으로 현대 사람들이 흘러간다. 그 광경이야 말로 강이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강이 은닉한 공포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담긴 끔찍한 그 자체라는 것을. — 132p
"미쓰요 안에서, 뭔지 모르지만 동그랗고 예쁘고 쓸쓸한 게 보여, 반딧불이처럼." 마코토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항상 있어?" 나는 물었다. "아니, 조용하게 있을 때만. 나는 그걸 보는 게 좋아." (중략) 강하고 밝게 장미빛으로 빛나는 빛에.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의 빛이고, 마코토는 그 빛을 좋아해서 지켜 주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었다. — 137p
문득, 비도 오고 꿀꿀한데 크로아상에 커피나 먹을까! 하는 생각에 백화점에 갔다. 파리에서 휴대폰을 도둑 맞았을 때, 나는 아주 잠깐 망연자실 한 뒤 돌아가는 길에 조엘의 권유로 커피를 마시고 좋아하는 꽃과 타르트를 샀다. 그러고는 집에 가자마자 아이슬란드 스웨터를 꿰어 입고, 맥주병에 꽃꽂이를 하고, 그렇게 먹고도 또 타르트를 먹으며 조엘과 드라마를 몰아 봤다. 그때 조엘은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 치고 회복이 너무 빠르지 않냐고 했지만, 사실 나는 무척 상심한 상태였고 그런 자신을 달래 주려고 좋아하는 것들을 바리바리 모아서 요새를 만든 거겠지. 오늘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 때 즐겨 먹던 크로아상과 커피를 사서 야금야금 음미해야지. 그러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때도 그랬으니까 비슷하게 흉내내 볼까!'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커피는 쌉쌀하고 크로아상은 고소하고 단발적으로 떠오르는 추억은 여전히 선명해서 즐거웠다. 그나저나 오빠가 준 복권이 당첨되서 오빠가 약올랐으면 좋겠다.
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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