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스가 마르길 기다리면서, 앞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적어보았다. 갑자기 수 년을 쉬지 않고 달려온 마냥 숨이 차다.
오전에 순아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연인이라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좀 있어보이는 두 남녀가 마주보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큰 사이즈의 커피 두 잔과, 남자의 노트와, 두 사람이 읽고 있는 책 외에 더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둘은 말 없이 책을 읽었고, 한 번 여자는 화장을 고쳤고, 남자는 이따끔씩 책 위에 노트를 펼치고 메모를 했고, 나는 그저 그 모습이 좋아 보였다.
헤르체고비나의 어느 시골 아침, 침대 머리맡으로 들이닥친 빛에 잠에서 깨었다. 나는 내내 심통이 나있었다. 창문을 열고 바라본 낯선 풍경의 무엇도 내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저 멀리 보이는 소박한 성당뿐인 그 풍경이 내가 사랑하는 두 가족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것임은 알았다. 그 사실만으로 나는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아침, 마치 우리를 환영하듯 그 풍경 위로 커다란 무지개가 떴다. 아주 선명하고 커다란 무지개였다.
창가에 기대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순간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고, 몸을 돌리다 검은 고양이의 노란 눈과 마주쳤다. 생각해보니 우리 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리와, 이리와봐, 라고 생각하는 찰나 한 번 더 울더니 창가 앞을 지나쳐갔다. 천천히. 고양이는 항상 그 굽은 등이 문제다. 손을 대면 마른 햇살이 고요히 떨어질 것 같다.
강아지풀, 패랭이꽃, 민들레, 제비꽃, 바람꽃, 함박꽃나무, 애기똥풀, 금낭화, 작약, 돌단풍, 무스카리, 아주가꽃, 마타리, 산유수, 며느리밥풀꽃, 나비바늘꽃, 꽃사전을 보며 꽃의 이름을 불러본다. 다함께 야생화의 이름을 천천히 불러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벚꽃 흐드러진 밤에 함께 영화 밀크를 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희망에 대해서 거창하게 연설'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외워 와서 '누가누가 천천히 낭독하나 대회'를 열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박정대 시인의 시를 찾아보았다. 몇몇 시가 익숙하다.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 적막한, 적막해서 /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있다 /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 /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 /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 박정대>
요즘 나의 생활을 설명할 길이 없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려다 내 사랑이 물기를 머금는 날이 여전히 잦다. 그럴 때마다 순아의 편지를 되뇌인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손을 벗어난 막연한 슬픔과 희망이 아닌, 훨씬 구체적인 세계의 슬픔과 희망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슬퍼하고 구체적으로 희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임을 믿는다.' 조만간 꽃시장에 갈 것이다. 한아름 안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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