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어제 밤에 정인이가 뉴욕에 있는 CCTV 카메라를 찾으러 갔다. 뉴욕에서 전화가 왔다. "Amsterdam Ave 찾았어. 지금 W107th St이야." "거기 아니야 Duke Elington을 찾아서 거기랑 만나는 W106th St으로 가." 그러다 결국 찾아냈는데 뉴욕의 한 병원에 있는 카메라였다. 화면에 비춰지는 건물은 병원의 입원동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지 못해 정작 카메라에 찍힌 정인이를 캡쳐하지는 못했다. 같은 날 밤 나는 똥값으로 떨어진 달러 덕분에 Keynote 프로그램을 헐값에 살 수 있었다. 2만원도 안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내에 있는 화방에 갔다. 일주일치 판넬과, 모델링 페스트, 바니쉬를 사고 나오려는데 붓이 학교에 있는 것이 생각났다. 때문에 아깝지만 붓도 자주 쓰는 크기로 몇 개. 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서점에 들러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를 샀다. 이번 호에 비욕이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다. 아이슬란드에 해 뜨는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려고 기다리다가 자버렸다. 일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새로 깐 오리털 이불을 보니 드디어 가을이란 느낌이다. 졸면서 모델링 페스트를 발랐더니 정말 거지같이 발라졌다. 먹으면 배고프고 자면 졸리다. 짐승이 되어가나보다.
9월 20일 어제는 날이 추워서 맛있는 카푸치노가 먹고 싶었다. 오랜만에 전광수 커피집에 가서 카푸치노와 마카다미아 쿠키를 시켰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발표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디지털 페인팅 수업에 사용할 이미지만 정리하다 시간이 갔다. 정리, 요즘 정리만 하고 있다. 카페에는 두 시간 정도 있었다. 다섯시 즈음이 되어 근처 사진관에 맡겨두었던 필름을 찾으러 갔다. 문득 손에 잡히는 사진 인화 용지의 감촉이 그리워서 몇가지를 골라 다시 인화를 맡겼다. 20분 정도 걸린다기에 교보문고에 가서 나라노트를 샀다. 다시 사진관에 도착했을 때 받아든 사진이 따끈했다. 이정도의 미온을 '뜨겁다'가 아니라 '따스하다'고 여기는 계절이 되었구나, 벌써. 집에 와서 다시 확인해보니 다행이도 괜찮은 사진이 많았다. 밤에 잠이 안오길래 정인이에게 뉴욕에서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드로잉북 좀 사다줘'라고 메세지를 넣다가 교보문고에 검색해보니 유니레버 시리즈의 원서가 만 이천원에 팔기에 덜컥 주문해버렸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발이 시렸다. 시원하게 서걱거리는 이불의 감촉이 좋아서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보다가 출력소 영업시간이 되어서 일어나 전화를 걸었다. 이것저것 상담을 해봐도 시간이 촉박한 탓에 답이 없었는데, 캔버스의 사이즈를 키우니 간단하게 해결이 되었다. 바로 출력소에 넘기고 주스를 갈아먹었다. 어제 밤부터 골머리 썩던 일이 해결되어 기분이 좋다. 발표 준비를 하다가 오후에 출력물을 찾으러 가야한다. 한가람에 들러캔버스도 사야하고. 일이 많다.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너무 많이 걸어왔다. 요즘 그 아득함이 너무 빤히 보인다. 어떻게 하면 푸른콩으로 눈 떠 다시 푸른숨을 쉴 수 있을까.
9월 29일 두려웠던 타과에서의 발표를 잘 마쳤다. 내내 풀리지 않던 것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고, 진정한 충고를 듣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까이는 와중에도 변태처럼 히죽거릴 수 있었다. 그런 흥분은 오랜만이라 버니니를 마셨다. 선유도 공원에서 나오는 길이 예뻤다.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일본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사진을 찍었다. 부디 솔직하게만, 부디 그 모습 그대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유도 버스 정류장은 다리 한복판에 있다. 나는 다리가 좋다. '대교'란 이름의 것들. 결코 짙지 않은 한강과 그만큼 옅은 하늘, 촌스러운 색의 다리, 흑연을 닮은 서울, 오후의 공기. 낮의 다리를 지나는 동안에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오랜만에 홍대에 갔고, 당고집 정식은 여전히 맛있었다. 누와 함께 녹색광선의 창가 자리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차 심사에 떨어졌다. 생각만 했지 움직이지 않았고, 그리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 사실은 비난할 작격 따위 내게는 없다. 추스르는 속도보다 빠르게 세상이 무너진다. 무너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마주보고 다시 쌓을 힘이 어디에 있을까. 더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지수가 말했다. "너는 그냥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에게 가면 돼" 누구? 뉴욕에 있는 정인이가 폭설에 가사를 붙였다고 연락이 왔다. '이 눈이 그칠 줄 몰라서 니가 길을 잃은 것 같아. 기록적인 폭설 속에 얼어가고 있는 건 아닐런지' 차라리 눈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너를 둘러 싼 공기를 좋아했다. 나는 몰래 큰 숨을 들이키고는 했다.
10월 29일 금요일은 언제나 기분이 안 좋다. 순전히 수업 탓이다. 수업이 끝나고 밤 길을 혼자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때면 언제나, 가로등 빛은 괜히 짠하고 길은 괜히 일렁인다. 그럴 때면 누군가와 함께 걸었던 길들을 떠올린다. 다른 때에 다른 곳에 있었던 길들을 말이다. 배고파서 모락산에서 혼자 비지찌개를 먹었다. 집에 가기 싫어서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최대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주문했던 파일의 내지가 들어왔다는 전화에 서현역에 들렀다. 잃어버린 지우개도 샀고, 전부터 예쁘다고 생각했던 필통도 샀다. 언제나 활기차게 전화를 받던 담당자의 얼굴을 그 때 처음 봤다. 괜히 또 시선을 피한다. 오리역에 있는 영화관에 갔다. 오랜만에 창구에서 표를 사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예매를 하지 않았다. 직원이 한 명 뿐이었고 영화관은 한적하다 못해 썰렁했다. "레스트리스요" "I8이요" "네" 적립 카드를 만들었더니 팝콘 무료 쿠폰을 주었다. 이런 직원들은 게임의 NPC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우울한 날에 위로가 되는 것은 친한 친구도 아는 사람도 아닌 이런 사람들이다. 웃어주고 인사해주고 팝콘도 준다. 레스트리스를 봤다. 혼자서 봤다. 영화관에 나 밖에 없었다. 팝콘과 사이다를 우걱우걱 먹으면서, 좋은 노래가 나오면 스마트하게 어플로 검색까지하면서 봤다. 사운드트랙이 다 좋았다. 좋아하는 Sufjan Stevens의 노래도 많이 나왔다. 폴이 자주 흥얼거리는 프랑스 노래도 나왔다. 엔딩 곡은 니코였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예쁜 애들이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 속에서 꽁냥꽁냥 노는 게 참 예쁘더라. 죽은 아이의 장례식에서 예뻤던 추억을 떠올리며 실실 웃느라 단상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아이가 참 예쁘더라. 그게 너무 예뻐서 울면서 웃고 싶더라. 거지 같은 방법으로 끝이나 이제는 사라졌다하더라도 소중했던 순간은 언제나 찬란하지. 불 꺼진 백화점을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니 11시. 몸에 과실의 먼지가 붙어있는 것 같아 씻었다. 알람을 꺼놓고 잤더니 12시가 다 되어 일어났다. 폴이 '조엘이랑 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너도 나올래? 너도 나와라. 제발. 안 될 것 같다고 말 하지마' 라고 너무 간곡하게 말해서 엄마랑 포메인에서 월남쌈을 먹고 죽전으로 갔다. 최근에 포메인에 자주 간다. 요즘 꼴이 추해서 걱정했는데, 애들은 오히려 무심한듯 시크한 나의 머리가 좋다고 했다. 근데 계속 피곤하냐고 물어본다. 추하긴 추한가보다. 폴이랑 같이 러쉬에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러쉬 냄새가 진동한다. 핸드크림을 테스트 해봤는데 아직까지도 손이 부들부들하다. 투카투카 고체향수를 샀다. 크리스마스 한정 상품으로 나온 틴트가 예뻤는데, 돈이 없어서 못 샀다. 벌써 크리스마스 한정 상품이랍시고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직 할로윈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페레로 로쉐 광고가 어찌나 고품격인지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먹고 싶다. 시리얼을 좋아하는데 스페셜 K에서 새로 나온 레드크런치가 맛있어 보인다. 건 크랜베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래놀라 시리즈도 좋아했는데. 조할리 블로그를 염탐하다가 팬케이크가 먹고 싶어졌다. 거대한 사이즈의 겹겹이 쌓아올린 팬케익에 버터를 바르고 시럽을 훌렁훌렁 뿌려서 먹고 싶은데, 팬케익. 내가 만들어 먹는 거 말고 카페에서 해주는 게 먹고 싶은데, 팬케익. 동네에서 유일하게 팬케익 해주던 카페는 아주 오래전에 문을 닫았다. 아주 예쁜 기억이 많은 그 카페는 지금, 고약한 취향의 고약한 카페로 바뀌어있다. 누가 분당에 오면 마리오 크레페를 처묵을까. 작업을 해야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마실 나갔다 올 것 같다. 시리얼하고 페레로 로쉐 사러. 만화책도 빌려야지.
10월 24일 소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고 작아져서 우주를 떠돈다. 그래서 우주에는 우주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소리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혹은 과거의 우리들에게서 반사되어 나간 빛들은 어디로 갈까 궁금해졌다. 재욱이에게 물어보니 모두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물체에 흡수가 된다고 했다. 그 후 반사된 나머지 빛들은 무에 가깝게 작아지고 작아져서 소리처럼 어딘가를 떠돌 거라고 했다. 굴절되고 분산되어 고유의 성질은 사라지겠지만 어쨋든 존재한다고. 그것이 못내 벅차서 '참 다행이지 않니. 그 순간이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존재한다니. 그것들이 너무 외롭게 떠돌고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문자를 쏭에게 보냈다.
11월 30일 아이슬란드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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