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어김없이 천천히 걸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중력이 사라져 흔들흔들 걷는데도, 고개가 무너지는 걸 보니 몸 안에 블랙홀이 있나보다. 거대하고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모든 것이. 한 때 순아는, 구멍을 단단하게 해야할 거라고 했지만 점점 더 커져만 갈 뿐이라. 슬며시 느껴지는 미온에 돌아보면 언제나 고양이, 투명하게 굽은 고양이의 뒷모습이 있다. 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울 때마다 몸 속의 구덩이에서부터 눈 꼬리까지 파도가 이는 것 같다. 그 작은 것이 온 몸으로 내게 괜찮을 것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아, 마치 언젠가의 너 같다고 생각했다. 외로워서 읽기 시작한 시집이 이제는 나를 갉아먹기 시작하고, 나는 침대맡에 쌓여 있는 시집의 높이로 구덩이의 깊이를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아아, 로즈마리와 라벤더, 그리고 수국이 필요하다. 로즈마리는 물에, 라벤더는 베개에, 수국은 모든 곳에.
당신이 세상에서 처음 내는 목소리로 / 안녕, 하고 말해준다면. / 나의 귀가 이 세계의 빛나는 햇살 속에서 / 멀어버리지 않는다면. <안녕, 드라큘라> 하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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