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14

26nd March, 2014

    왁스가 마르길 기다리면서, 앞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적어보았다. 갑자기 수 년을 쉬지 않고 달려온 마냥 숨이 차다. 무서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 무서워, 무서워요, 무서워, 말이 의미를 잃고 낯설게 느껴질 때까지 되뇌었는데도,
    오전에 순아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연인이라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좀 있어보이는 두 남녀가 마주보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큰 사이즈의 커피 두 잔과, 남자의 노트와, 두 사람이 읽고 있는 책 외에 더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둘은 말 없이 책을 읽었고, 한 번 여자는 화장을 고쳤고, 남자는 이따끔씩 책 위에 노트를 펼치고 메모를 했고, 나는 그저 그 모습이 좋아 보였다.
    보스니아의 어느 시골 아침, 침대 머리맡으로 들이닥친 빛에 잠에서 깨었다. 나는 내내 심통이 나있었다. 창문을 열고 바라본 낯선 풍경의 무엇도 내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저 멀리 보이는 소박한 성당뿐인 그 풍경이 내가 사랑하는 두 가족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것임은 알았다. 그 사실만으로 나는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아침, 마치 우리를 환영하듯 그 풍경 위로 커다란 무지개가 떴다. 아주 선명하고 커다란 무지개였다. 
    창가에 기대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순간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고, 몸을 돌리다 검은 고양이의 노란 눈과 마주쳤다. 생각해보니 우리 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리와, 이리와봐, 라고 생각하는 찰나 한 번 더 울더니 창가 앞을 지나쳐갔다. 천천히. 항상 그 굽은 등이 문제다. 손을 대면 마른 햇살이 고요히 떨어질 것 같다. 
    강아지풀, 패랭이꽃, 민들레, 제비꽃, 바람꽃, 함박꽃나무, 애기똥풀, 금낭화, 작약, 돌단풍, 무스카리, 아주가꽃, 마타리, 산유수, 며느리밥풀꽃, 나비바늘꽃, 꽃사전을 보며 꽃의 이름을 불러본다. 다함께 야생화의 이름을 천천히 불러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벚꽃 흐드러진 밤에 함께 영화 밀크를 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희망에 대해서 거창하게 연설'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외워 와서 '누가누가 천천히 낭독하나 대회'를 열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박정대 시인의 시를 찾아보았다. 몇몇 시가 익숙하다. 
"나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 너의 얼굴을 만지면 손에 하나 가득 가을이 만져지다 부서진다 / 쉽게 부서지는 사랑을 생이라고 부를 수 없어 / 나는 사랑보다 먼저 생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 적막한, 적막해서 / 아득한 시간을 밟고 가는 너의 가녀린 그림자를 본다 / 네 그림자 속에는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이 담겨있다 /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끝내 사랑할 수가 없어 / 네 생각 속으로 함박눈이 내릴 때 / 나는 생의 안쪽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만 볼 뿐 / 네 생각 속에서 어두워져가는 내 저녁의 생각 속에는 사랑이 없다 / 그리하여 나의 쓸쓸함엔 아무런 기원이 없다 / 기원도 없이 쓸쓸하다 / 기원이 없어 쓸쓸하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 박정대>
    요즘 나의 생활을 설명할 길이 없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려다 내 사랑이 물기를 머금는 날이 여전히 잦다. 그럴 때마다 순아의 편지를 되뇌인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손을 벗어난 막연한 슬픔과 희망이 아닌, 훨씬 구체적인 세계의 슬픔과 희망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슬퍼하고 구체적으로 희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임을 믿는다.' 조만간 꽃시장에 갈 것이다. 한아름 안아올 것이다.

지난 4월 1일의 아침. 그때는 그 순간이 그리워지리라 생각지도 못하였다.

3/13/14

기 록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고흐> 

세계는 어째서 자신을 약탈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는가? 어째서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감고 있는가? 의로운 자는 누구이며, 악당은 누구인가? 국제적 정의가 정말 존재한다면, 어째서 권력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가? 5개 국가가 유엔에서 불가침의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보는 자들이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세계의 주요 무기생산자인 5개 국가의 손에 세계평화를 맡겨놓는 것이 공정한 일인가? 이것은 또하나의 조직범죄가 아닌가? 이렇게 물어보자. 이 독선적인 세계의 지배자들이 '죽이는 것'을 그토록 좋아한다면, 어째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 성향을 사회적 불의를 '죽이는' 데는 쓰지 않는가? (중략) 루이스 캐럴의 여왕은 앨리스에게 거울 속 세상에서 정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왕이 보낸 사신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어. 벌을 받고 있는 거지. 재판은 다음 수요일에나 시작될 거야. 물론 범죄는 맨 마지막에 발생하지." <정의의 여신은 왜 눈을 감고 있는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백의 그림자> 

간디의 주요 저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힌두 스와라지>를 보면, 대담 상대가 "비폭력 저항은 이상론으로서는 이해하겠지만, 성공한 사례가 역사상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간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책에 적혀있는 것은 왕이 한 일, 왕이 한 일은 전쟁뿐이었고, 확실히 역사책에는 전쟁에 대한 기록밖에 없다. 하지만 비폭력이 있었다는 증거는 바로 우리가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비폭력으로 살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지, 만일 역사책에 적힌 대로 전쟁만 존재했다면 인간은 전멸했을 것이다."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 

"여러분들에게 미래를 만들 것을 요구합니다.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드십시오. 부디 멀리 떨어져서 삶을 쳐다보지 말고 힘써 살아내십시오." <파파 프란치스코>

2/2/14

Hi, February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밖에 나왔다가 공기중의 젖은 흙내음에 당황했다. 아직 2월이 된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았는데, 3월인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더워서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고, 두터운 외투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결국 늦봄에도 잘 마시지 않는 아이스 커피를 찾았고, 잔을 들 때마다 얼음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낯설었고, 이와중에 창밖에는 맨다리를 드러내고 분홍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지나가고 있다. 이상한 계절이 아닐 수가 없다. 이곳의 날씨를 듣고 쏭은 ‘갈 곳 없는 눈과 겨울들이 이곳과 시카고로 모였나보다’라고 했다. 쏭은 지금 눈이 엄청 휘몰아치는 덴마크에 있다.

요즘은 안토니오 타부키의 <꿈의 꿈>을 읽고 있다. 스무명의 예술가들이 꾸었을 법한 꿈에 관한 짧은 단편들로 엮여진, 시집 같은 판형의 책이다. 카라바조와 프랑수아 라블레, 자코모 레오파르디의 꿈이 귀여웠다. 우뢰와 같은 거인의 트름 소리에 잠에서 깨고 보니 폭풍치는 밤이었다던가, 카라바조의 그림 ‘마태오의 소명’이 실은 꿈의 한 장면을 그린거였다던가, 자신이 쓴 시 속의 여인이 꿈에 등장한다던가 하는 발상들이 간질간질 했다. 실비아, 나의 실비아. 레오파르디가 소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널 다시 만나다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12월에 산 AVEC 4호에 실린 사진가들의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빛이란 어떤 의미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한 문장. "우리 모두에게 어딘가에서 본 유난히도 찬란하던 노을 빛에 특별할 것 없던 하루를 인상 깊게 마무리 한 적이 있을 것이다. Rachel Duffy." 하지만 빛에 관하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요한 복음에 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로렌스 애니웨이>를 한 번 더 보고 싶다. 영화가 끝나고 벅차는 마음에 한 동안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욕조에 걸터 앉아 화장하는 로렌스를 바라보던 프레드가 속삭이듯 말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이 사랑을 보라.


Why not? / I know what I look like. 
It's working. It works. / You sure? / Yeah. / Mer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