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16

but I always stand up

             요즘 소화가 잘 안 된다. 내가 그동안 홍차를 물 먹듯이 먹어서 위가 희끄무레 해진 건 아닐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 (드디어) 미루고 미루던 시험을 접수했다. 그놈의 시험. 일단 시험이 끝나면 생물의 번식이니, 경제 대공황이니, 수면 장애니, 원시 부족의 관습이니 하는 것들이 머리 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소설과 시를 읽고 영화를 보고 싶다. 지난 주에 쏭을 만났다. 초록색 원단으로 주문한 책 덮개를 선물하면서, 도시에서의 삶이 좀 더 소소하고 다채로워지기를 바랬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북반구의 땅을 그리다가, 우리 꼭 트롬쇠에 가자, 트롬쇠에 가자, 트롬쇠에 가자. 우리 꼭 트롬쇠에 가자. 그런데 그 말이 계속해서 입가에 맴돌아 웃음이 난다. 마치, 북극의 거대한 빙하에서 떨어져 나와 흐르다가 태평양 연안에 녹아든 빙하 조각 같다. 그 희고, 푸르고, 시린 것들이 자꾸만 그리워서 자꾸만 돌아가려고 하는. (왜 그리움에는 한계가 없을까. 그리움은 도대체 무엇일까. 회귀?) 쏭이 페터 슈탐을 추천했다. 아주 좋다.
             "점심때 그녀는 눈 위로 불쑥 솟은 바위 위에 앉아 숨을 돌리며 싸가지고 온 음식을 조금 먹었다. 그녀는 바위를 덮고 있는 주황색, 노란색, 흰색 이끼를 가만히 쓰다듬어보았다. 잠시 후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하자 엷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하늘은 푸른 기운을 잃고 점점 더 창백해 졌다. 하지만 잘 아는 길이었고 등대도 여러 번 가본 적이 있었다. 해가 모습을 감추자 사물의 윤곽이 흐릿해 졌지만 그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없었다." <희미한 풍경, 페터 슈탐>
             오늘은 학원에 갔다가 번역을 하고 왔다. 몹시 힘이 든다. 이럴 때면, 근육까지 분해해서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같다. 노곤노곤하다. 새로운 친구가 생겼는데, 그녀는 이제 막 11개월이 되어서 매우 귀엽다. 말랑하고 따끈한 볼이 아주 귀엽다. 그맘 때의 아이들을 보면 '삶'이라는 것이 그 의미처럼 무척 선명하고 생생해져서, 잘 살아야지, 잘 살아야지, 다짐하게 된다. 시간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 같기 때문에.
             때때로 모든 생명이 자취를 감추었던 그 갯벌을 떠올린다. 잊혀질 법도 한데,  잊혀지지 않는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주 아주 깊은 곳의 무언가가 아주 아주 오랜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다. 달이 유난히 커다란 몽골 초원에서도, 오로라가 춤추던 밤에도,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던 때에도, 나는 아주 아주 깊은 곳의 무언가가 아주 아주 오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 모든 것이 우직하게 존재했을 수억만년을 거슬러 올라가, 이 세상의 시작을 마주한 기분. 몹시 선하고, 무척 아름답고, 너무나 애틋한.


Hoppipolla, Sigur Ros 'I get a nosebleed, but I always stand up'

12/18/15

We stared up at the sun with our eyes closed

             최근에는 쏭과 영화를 자주 보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11월에 보았던 ‘에릭 보들레르’의 <막스에게 보내는 편지>가 가장 인상 깊었다. 영화, 라고 해야 할지 영상 작업이라고 해야 할지. 영상은 작가 에릭 보들레르가 90년대 내전을 통해 조지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자치공화국 아브하지아의 외무 장관이었던 막스에게 “Are you there?”라고 묻는 편지를 보내며 시작한다. 영화는 둘이 74일 동안 주고 받은 서신들을 주 내용으로 한다. 첫 번째 편지를 보낼때, 에릭은 사실 편지가 도착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그저 파리 우체국이 어떤 이유로 우편물을 반송할지가 궁금했다고 했다. 올바른 주소가 아니다, 국가가 아니다, 같은 이유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편지는 어떤 경로로 막스에게 배달되었다. 에릭의 편지가 화면에 텍스트로 보여지는 반면 막스의 편지는 아브하지아가 국제 우편물을 취급하지 않는다며 나레이션으로 들려진다. 둘은 서신을 통해 아직 국가로 인정받지 않은 아브하지아의 역사, 분단, 국가의 개념, 둘의 추억, 꿈 등을 이야기한다. 서신이 보여지고 들려지는 동안 아브하지아의 풍경과 막스의 일상이 잔잔히 흐르는데, 영화에 담긴 모든 것이 삶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해서 한참을 먹먹해 했다. 정치, 분단, 국가, 이상 같은 단어가 일상, 희망, 그리움을 만나 그저  삶을 이야기하는, 마치 당연하기만 했던 어떤 순간이 선명해져 오랫동안 마음을 맴도는 그런 영상이었다. 내가 원하는 걸 곧이 곧대로 담아낸 작업들을 보면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는데, 마냥 좋았다. 누가 하든, 그런 작업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참 고마운 일이다.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웃기고 슬프고 재미있다. 글을 쓰는 자세나 습관에 관한 내용이지만, 결국에는 그 모든 게 창작과 관련된 것이라. 뭘 하든 결국 다 마찬가지구나 싶다. 툴툴 거리면서도 결국은 하게 되는 것이. “그럼 왜 쓰는가. 간단하다. 내 경우, 안 쓰고 사는 일이 쓰고 사는 일보다 더 불행하기 때문이다. 더 불안하고 우울하며 더 권태롭기 때문이다. 끔찍한 짓이지만 쓰는 것이 나를 지키고 사는 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탈진의 국면이 지나면 아, 나는 반드시 또 이 짓을 시작할 것이다. 불치병이다. 글쓰기의 병은 글쓰기로 견디는 게 그나마 제일 상수다. 나는 그렇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현상한 필름에 오른쪽 사진이 있었다. 어느 9월 무렵이었던 것 같다. 더 나은 권리를 주장하는 순아의 다큐멘터리가 결국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상금을 나눠주겠다며, 두 번에 걸쳐 보낸 입금 내역에는 '고맙습니다', '높아져라 삶의'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되겠냐며 작업하던 순아도, 나이가 들면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무섭다던 쏭도, 결국에는 어느 9월 무렵의 저 순간처럼 찬란하니 아, 예뻐져라 내 삶, 하고 마음 먹는 날.

12/4/15

Gdańsk, Poland


마지막 사진은, 그 순간의 내가 바랐던 그대로. - - - - - - - - - - Gdańsk, Poland, Ma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