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14

모네를 향한 반성문

    한 달이 이렇게나 빠르다.

    지난 수요일, 리따 언니와 함께 오르세전을 보러 갔다. 전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사실 나는 ‘명화’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은 소비될 대로 소비되어 그 작품이 본래 가지고 있었을 무엇은 잃고 누군가 부여했을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드가가 보고 싶었고, 모두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졌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고 여느 때처럼 내가 타고 있던 버스가 이태원을 지날 때 언니가 올라 탔다.

    아직도 전시관 입구에서 두번째로 걸려 있던 모네의 <서리>가 떠오른다. 눈이 내린 들판을 그린, 뚜렷한 형체 하나 없는 그 그림에서, 미미하게 덧칠해진 연분홍색이 아른 거린다. 그 색에, 나는 그가 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눈으로 뒤덮힌 겨울은 눈을 닮지 않는다. 대기는 쓸데없이 투명해서 시퍼렇게 빛나고, 새벽이면 땅 끝 언저리는 이따금 수줍게 물든다. 그는 아마 그 대기를 담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온갖 미미한 빛으로 물든 눈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다리, 집, 보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 이 사물들이 놓여있는 공기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다. 
     그건 불가능이나 다름 없지.” 부인 알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클로드 모네, 1894년

    이 글귀 앞에서, 나는 전시장 안의 그 어떤 그림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사로잡혀 있었다. ─ 공기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다. 이 사물들이 놓여있는, 공기의 아름다움을 ─이 문장을 곱씹었다가, ─ 그건 불가능이나 다름 없지 ─ 마지막 문장에 사로잡혔다. 미술사 시간에, 인상파의 한계는 처음부터 명확했다는 교수님의 말은 항상 내게 흥미롭게 기억되어 있다. 애틋해서 기억에 남았다. 그 말에 정신이 들어, 전시장 중앙에서 그의 그림을 둘러보니 한 없이 사랑스러웠다. 사물을 중심에 두고서도 왜 저렇게 대충 그렸을까 싶었던 그 사물의 주변을 보니, 그를 둘러싼 색과 붓의 흐름이 모네가 그리려 했던 것이 사물만은 아님을 알게 했다. 그 사이로 그가 느꼈을 그 순간이 흘러가는 듯 해서, 바람이 불고 물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웃음이 났다. 그런 의미에서 <서리>가 가장 좋았다. 텅 비어 보이는 그 그림이 가장 많은 것을 품고 있다.

    하지만 고흐는 여전히 모르겠다. ─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글은 매우 좋아한다.

5/26/14

26th May, 2014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마음의 공기가 탁하다.

<지난 일주일간 나는 이례가 없었을 만큼 아팠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를 안고 엄마는 동네 작은 병원으로 달렸다. 정신이 좀 들었을 때는 수액실 한켠에서 담요에 싸여 링거를 맞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쉬어봤다. 특별히 해야 하는 것이 없으니, 자다가 일어나서 밥을 먹고, 책을 보다가, 다시 자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봤다. 문득 여름인지라 창가의 나뭇잎이 무성했고, 그것들이 흔들리는 걸 소파에 누워 바라보는 때가 잦았다. 이 갑작스러운 휴일도 오늘로 마지막, 아직 비실비실 하지만 방 청소를 했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을 모아 제 자리를 찾아주고, 오래된 물건을 버리고, 빨래감을 내놓고, 청소기를 돌렸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마음을 환기하려 짧은 일기라도 쓰고 있다.

지난 토요일 덴마크 오르후스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렸었다는 쏭의 연락에, 북유럽에서 동성애 합법화가 가장 빠를 수 있었던 이유를 물었더니 덴마크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그룬트비히라는 사람을 언급하며 “그 사상에 따르면  ‘덴마크 다운 것’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EQUALITY’래” 라는 다른 우주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꾸준히 축적된 역사 덕분이라기에, “긴 싸움이구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삶이 그러하네”, “그러네” 하며, 우리 삶의 모든 긴 여정에 대한 각오로 이야기는 끝났다.

말은 힘을 잃고, 물기를 머금은 슬픔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디서 빛이 들어 이 모두를 말릴까. 힘내어라 사랑아, 네가 이길 날이 올테니.


We Must Hold On, Chantal Acda (feat. Nils Frahm)

5/17/14

<경제 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주의자, 꿈을 꾸고 있는 사람, 낭만주의자, 상아탑 속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고, 현상을 그대로 계속할 것을 말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될수록 무시하고 목전의 돈벌이에 전념한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현실주의자',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지구라는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는 우리들은 빙산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선내 방송에서 몇번이나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힐만큼 들어왔습니다. 그 말이 진부할 정도로, 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또 그 얘기?"라고 합니다. 마침내 빙산에 부딪힐 거라는 것은 알고 있더라도, 그 빙산은 아직 보이지 않아서 현실적인 얘기라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귀에는 들어와도 그것은 아직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있는 것은 타이타닉호라는 배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현실은 '타이타닉호'라는 배뿐입니다. 타이타닉호 속에는 판에 박은 다양한 일상사가 있습니다. 모두 각자 일상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계속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입니다. 누군가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비상식, 비현실주의적입니다. 현실주의적인 경제학자가 타이타닉호에 "전속력으로"라는 명령을 하려고 합니다. "속력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타이타닉호의 논리, '타이타닉 현실주의'입니다. 그것이 어째서 논리적이고 현실주의적으로 들리는가. 도무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만일 타이타닉호가 전세계라면, 배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논리적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이타닉호의 바깥에는 바다가 있고 빙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경제의 바깥에는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경제 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