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16

             ‘연필로 느릿히 낯선 문자를 써보고 싶다’는 이유로 초급 일본어 책을 사왔다가 (책꽂이에 잠시 모셔두고), 급히 꾸려진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발음과 구조에 이따금 혀를 내두르다가도, (사실은) 무척 즐겁다. 최근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 그래서, 새로운 언어를 몸에 익히고 쓰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내 몸이 새로운 소리를 내기 위해 애써 입술과 혀와 턱을 움직이는 것이, 손에 익지 않아 비투름한 문자가, 의미는 알아도 그 단어가 품은 결을 느낄 수 없는 답답함이, 몹시 좋았다. 묵은 나 자신에 균열을 내고, 살을 찢어서, 확장해 나가는 듯 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주 생생하게 능동적으로 살아있는 것 같았다.

             농도가 서로 다른 스무 개의 연필을 늘어 놓고  자잘한 면으로 종이를 채워나가다 문득 깨달았다. 큰 의미도, 특별한 주제도, 기발한 발상도 없지만 알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는 평가의 의미를. 작품에 내가 없다는 비평의 의미를. 내 손을 거친 것은 무엇이든 닮아 있다는 말의 의미를.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내 것을 타인의 눈으로 보고 싶다’던 것의 답을.
             무의미한 선과 색이  끊임 없이 덧대어지고 덧대어져서, 꾸준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형태를 알 수 있는 것. 마침내 모든 것이 의미를 띄고 하나를 이루는 것.  자수가 놓인 얇은 커튼과 유리 너머, 석양으로 물든 난간 사이로, 굳이 그 어지러운 시야 사이로 맞은 편 아파트에 불이 켜진 것을 바라보며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것. 차마 덜어내지 못해 내버려 두는 것. — 사는 것을 닮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그래서 그토록 불편했나 보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 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 11p 
             한강의 신작 <흰>을 읽었다. 흰 종이에 쓰여진 문자를 온전히 소화하려고 여러 번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5/10/16

바나나, 크로아상, 커피

          오랜만에 바나나를 읽었다. 대학에 있을 무렵, 전철에서 신작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 그리운 마음에 샀다가 다 읽지 못한 <막다른 골목의 추억> 단편집이었다. 딱히 연인도 뭣도 아닌 두 사람이 어쩌다보니 착실하게 시간을 쌓아가는 그런 이야기로, 대게는 이렇다 할 결말 없이 '그 나날을 품고 살아갑니다' 로 끝났다. 그 아무래도 좋은 느낌이 무척 편안해서 푹 빠져 읽었다. 최근에는 짧은 글의 호흡에 익숙해져 책 한 권을 다 읽기가 힘겨웠지만, 슬렁슬렁 읽다보니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있었다. 여전히 유령이라던지, 예기치 못한 운명적인 불행이라던지, 도저히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이상적인 관계가 소재로 등장하고 있어서, 어렸을 때 좋아했던 만화 영화를 커서 다시 보는 것 같은 재미도 있었다. 
강이란 참 신비로운 것이어서, 언제나 오싹할 정도의 공포를 은닉하고 있다. 화창한 날이면 찰랑찰랑 흐르고 반짝이는 햇살을 받아 물가에 핀 온갖 식물의 초록이 도드라져도, 왜인지 시커멓고 깊고 오싹한 어떤 것과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략) 그때, 강이 있는 도시에 내가 얼마나 쉬 녹아드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강의 흐름을 보는 것과 똑같다는 것도 알았다. 그곳은 반드시 역사가 있는 도시여야 한다. 오래되고 무겁고 섬뜩한 색깔과 형태의 건물 앞으로 현대 사람들이 흘러간다. 그 광경이야 말로 강이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강이 은닉한 공포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담긴 끔찍한 그 자체라는 것을. — 132p
"미쓰요 안에서, 뭔지 모르지만 동그랗고 예쁘고 쓸쓸한 게 보여, 반딧불이처럼." 마코토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항상 있어?" 나는 물었다. "아니, 조용하게 있을 때만. 나는 그걸 보는 게 좋아." (중략) 강하고 밝게 장미빛으로 빛나는 빛에.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의 빛이고, 마코토는 그 빛을 좋아해서 지켜 주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었다. — 137p
          문득, 비도 오고 꿀꿀한데 크로아상에 커피나 먹을까! 하는 생각에 백화점에 갔다. 파리에서 휴대폰을 도둑 맞았을 때, 나는 아주 잠깐 망연자실 한 뒤 돌아가는 길에 조엘의 권유로 커피를 마시고 좋아하는 꽃과 타르트를 샀다. 그러고는 집에 가자마자 아이슬란드 스웨터를 꿰어 입고, 맥주병에 꽃꽂이를 하고, 그렇게 먹고도 또 타르트를 먹으며 조엘과 드라마를 몰아 봤다. 그때 조엘은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 치고 회복이 너무 빠르지 않냐고 했지만, 사실 나는 무척 상심한 상태였고 그런 자신을 달래 주려고 좋아하는 것들을 바리바리 모아서 요새를 만든 거겠지. 오늘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 때 즐겨 먹던 크로아상과 커피를 사서 야금야금 음미해야지. 그러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때도 그랬으니까 비슷하게 흉내내 볼까!'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커피는 쌉쌀하고 크로아상은 고소하고 단발적으로 떠오르는 추억은 여전히 선명해서 즐거웠다. 그나저나, 오빠가 준 복권이 당첨되서 오빠가 약올랐으면 좋겠다.

4/23/16

늦봄의 근황

             오랜만에 글을 쓴다. 말로 할 수 없으니, 좀 더 자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봄이 되었다. 봄, 하면 미세먼지에 대한 걱정뿐이라 이제 감흥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제, 대기가 맑다는 간만의 소식에 창문을 열었다가 방 안 가득 새 우는 소리가 넘쳐서, 비내음이 섞인 청명한 대기에 문득 그리운 곳이 떠올라서, 봄, 봄, 봄, 되뇌었다.  발 끝이 시려와도 열어두었다.
             “요즘 생각해 봤는데, 스무살 때가 좋았어. 같이 고스톱 치고 말야. 참 그리워. 그때를 생각하면 돌아가고 싶지 뭐야. 응, 그래, 연락해줘서 고마워. 건강하고, 또 연락하자.”며, 휴대전화 너머로 말하는 어느 할머니의 목소리가 반가움과 그리움으로 반짝여서, 버스정류장에서 아직 싹이 나지 않은 나무를 올려다 보던 나는 무심코, “저도요.”라고 답할 뻔 했다. 저도요. 저도 그때가 참 좋았다고 생각해요.
             플랫화이트가 마시고 싶어서 최근 단골이 역 근처 카페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폭우가 내려서, 버스정류장에서 우산 없이 서있던 아저씨와 우산을 나눠썼다. 알고 보니, 내 또래의 손녀를 둔 할아버지였다. 내가 머뭇거린 시간이 적어서, 할아버지가 많이 젖지 않아 다행이다.
             며칠 전에 커팅 매트를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아는 사람이 새로 커다란 화방이 생겼으나 위치는 설명할 수 없다던, 화방을 발견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다양한 걸 갖추고 있어서 놀랐다. 물감도, 미디엄도, 회사별로, 종류별로 익숙한 건 전부 있는 듯 했다. 종이와 캔버스를 맞추는 곳도 따로 있었다. 무척 친숙한 풍경에 속에서 마른 나무와 종이 냄새와, 온갖 잡다한 화구 냄새가 뒤섞인 공기로 숨을 쉬고 있자니 년도도, 목적지도 불분명한 그리움이 스몄다.

             보고 싶었던 책, 만화책, 영화, 애니메이션, 가리지 않고 원 없이 봤다. 오래 전부터 외장하드에 묵혀 두었던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을 봤는데, 마치 신카이 마코토가 ‘흠, 이번에는 비가 오는 날의 빛을 그려보고 싶군. 스토리는 대충 이정도의 로맨스면 되겠지?’라면서 45분짜리 덕질 영상을 만든 것 같았다. 그가 삶에서 어떤 풍경을 눈에 담아 왔는지, 보는 내내 ‘맞아, 저 무렵의 저런 풍경은 아름답지’하면서 공감했다. 그가 1초도 쉬지 않고 그려내는 빛이 너무 황홀해서, 부럽지도 않았다. ‘대충 이정도의 스토리’라고 표현했지만, 비오는 날을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의 일상이 만엽집의 시가로 연결되는 것이 신의 한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찬란한 풍경이 그날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특별할 것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와 그가 그려내는 빛은 어쩌면 당연한 조합일지도 모른다.

             여튼 무척 좋아서, 감독이 직접 썼다는 소설판도 구매해서 읽었다. 그런데 의외로 본편보다 후기가 엄청 재미있었다.

‘소설 언어의 정원’ 연재를 시작했을 때에는 그래서 무척 행복했다. 글을 쓰는 게 즐거웠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불가능한 것, 복잡한 것을 실컷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예를 들어 ‘그녀는 미아가 된 듯한 미소를 띠었다’ 같은 문장이 그렇다. 그럴 때마다 어떠냐! 하고 나는 (애니메이션 감독인 자신을 향해) 외쳤다. 어떠냐, 이건 영상으로는 표현하기 어렵겠지. 배우는 적절하게 ‘미아가 된 듯한’ 표정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애니메이터가 누가 봐도 ‘미아가 된 듯한’ 얼굴을 과연 표현해낼 수 있을까. 아마 무리일 것이다. ‘웅성거림이 이어폰 밖으로 새오나오는 것처럼’이라고 썼을 때에도 너(영상)는 어려울걸 하며 혼자 히죽거렸다. (중략) 이렇게 흥분 속에서 덤벼든 집필 작업이었는데 당연하게도 즐거움은 지속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영상이 더 훌륭해, 또는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내내 들었다.
             이런 투덜거림이 후기의 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신랄한 내용에 웃으면서도 공감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시리게 푸른’이라는 문자를 쓰면서도, 마음에 떠오른 푸름을 해소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소설은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렇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을 찾아낸 듯한 심정으로 타카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령 빌딩 숲에 태양이 잠기기 직전, 열차의 차창 너머로 보이는 불빛과 하늘빛이 딱 맞춘 듯 어우러지는 시간대. 가령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츄오센에서 누군가와 닮은 모습을 발견했는데 상대가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소부센에 가려진 순간. 가령 텅 빈 상점가를 걷다가 문득 돌아본 복도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한없이 뻗어 있는 모습을 훤히 드러낼 때. 누군가가 가슴 안쪽을 거머쥔 듯이 괴로워진다. 이런 감정에는 이름이 없을까 하고 번번히 생각해본다. 이런 순간이 하루에 몇 번이나 찾아왔다.  그녀와 만나기 전부터 내가 이랬던가.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걸 알기 전부터 나는 이랬던가. 앞으로도 계속 이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진득히 생각해봤지만 타카오는 답을 찾지 못했다. 알게 된 건 간단한 대답뿐이었다. 그 사람을 위해 구두를 만들고 싶다는 것.
             이 부분이 좋았는데,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질 때가 딱 이런 기분이라 박수쳐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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