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2

16 Feb 2019

돌아와 먹어야 할 때, 식자재 떨어졌을 때, 를 제외하고는 누워 있거나 잠을 잤다. 몸도 그렇지만, 정신이 더 고단했겠지. 잠에서 깰 때마다 여기가 어디지, 잠결에 혼란스러워 하다가 절망하고 다시 잠들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보니 주말이 왔고, 친구들과 아침 약속이 있어서 겨우 나섰다가 봄을 보았다. 밤 사이 짙었던 안개가 이슬로 내려 앉아 반짝이는 뒷 뜰은 무척 아름다워서 한 동안 멍하니 문을 잡고 서있었다. 그래서인지 온 종일, 양평에서 J가 던졌던, 그러고는 며칠 전에 H가 전화 중에 다시 꺼냈던 그 질문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것에 민감한 사람은, 고통이 먼저였을까 아름다움이 먼저였을까?" 개인적으로 아름다움이 먼저이길 바란다. 그럼 그건 회복의 몸짓일테니.

해 질 무렵은 무안할 정도로 짧아서, 빨래를 걷으러 방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올 틈에 대기가 달라진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 흘끗거린 창문마다 색이 달라 창문마다 다른 세계가 이어진 것 같고. 모든 것이 끝난 후 들여다 본 마음에 쌓인 것이 저 모든 색이었으면. 슬픔이 아니라. 체념이 아니라. 말들이 다시 선을 그을 때마다 '내가 아는 너는 언제나 사랑하려던 사람이었지'라던 순아의 말을 떠올리며, 넘어가, 넘어, 되뇌인다. 넘어가. 넘어.

11/3/17

September, 2017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 지내는게 아니었는지, 날이 좋아 산책을 나서는데 초조했다. 작은 신발에 제 발을 우겨 넣고도 괜찮다며 잘 알지도 못하는 먼 길을 떠나는 기분. 얼마 안가 발이 아프다고 주저 앉을 게 뻔한 예감. 

             돌아온 이래 천천히 짐을 정리하고, 장 봐다가 밥을 지어 먹고,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자주 가던 마트의 품목과 배치는 달라진 게 없어서 익숙하게 장을 보고, 한 정거장 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트램을 타고,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서 방문을 열고, 사온 물건들을 바닥에 늘어 두고서 제 키보다 작은 냉장고에 가장 작은 것으로 고르느라 애쓴 물건들을 켜켜이 쌓았다. 정사각형의 좁은 나무 탁자에 상아색 식탁보를 깔고, 접시에 잡곡빵 두 조각과 토마토, 적양파, 오이를 썰어서 담고, 잘 익은 아보카도를 담고, 오목한 그릇에는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여러 과일과 뮤즐리, 꿀을 넣은 요거트를 만들었다. 언제든 빵에 발라 먹을 수 있도록 후무스와 루꼴라 바질 페스토까지 꺼내두면 근사한 아침 혹은 저녁 식사가 되지만, 영양 섭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길가에 핀 들꽃이나 강에서 카누나 말을 타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웠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혼자 먹는 아침은 아보카도에서 비누맛이 나는지 우유맛이 나는지, 커피에서 싸구려 방향제 맛이 나는지 한약 맛이 나는지 알 수가 없다. 혼자 보는 풍경은 감각이 되지 못하고 허공에 흩날릴 뿐이었다. 나를 위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록 함께 하면 좋을 것이 뻔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들이 곁에 없다는 감각만 선명해지는 것이다. 

             내가 먹는 아침을 너도 먹었으면 좋겠다. 르완다 원두로 내린 커피를 너도 마셨으면 좋겠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낯선 발음의 이 인사를 너도 들었으면 좋겠다. 고국과 확연히 다른 이곳 태양의 각도를 너도 봤으면 좋겠다. 카누를 타러 가자, 노가 물살을 가르는 감각이 좋으니까. 여름밤의 강변에서 술에 취해 한참을 웃고 노래를 부르는 내 친구들을 너도 봤으면 좋겠다. 새 해가 밝은 겨울밤의 광장에서 불꽃놀이에 넋이 나간 내 친구의 뒷모습을 너도 봤으면 좋겠다. 그저, 이 모든 아름다움을 네가 봤으면 좋겠다. 네가 좋으니까. 네가 여기에 있으면 행복하게 웃을게 아주 선하니까. 

             소중한 사람 부자. 보고 싶은 사람 부자. 좋은 사람 부자.

6/5/17

겨울

             안부를 묻습니다. 저는 두 계절과 열 다섯 절기를 보내고, 세 번째 계절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맞으러 나갈 용기는 없어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 숱한 낮과 밤을 적응하려 노력했으나,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무엇에 적응하려 한 것인지 그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보호색을 입으려 한 것인지. 새로운 껍데기에 나를 우겨 넣으려 한 것인지. 너와 다르지 않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더, 더욱 더 무장하려 한 것인지. 얕보이지 않기 위해 발걸음마저 단속하려 한 것인지. —라는 수취인 불명의 글이 노트 구석에 자필로 쓰여 있었다. 어떤 겨울은 봄이 와도 물러섬 없이 상흔으로 남아, 마음에 바람 부는 밤이면 어김 없이 죽자고, 제발 죽자고 덤빈다. 그러면 나는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두가 깨어나 생명력으로 가득한 그틈에 숨어 있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