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17

September, 2017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 지내는게 아니었는지, 날이 좋아 산책을 나서는데 초조했다. 작은 신발에 제 발을 우겨 넣고도 괜찮다며 잘 알지도 못하는 먼 길을 떠나는 기분. 얼마 안가 발이 아프다고 주저 앉을 게 뻔한 예감. 

             돌아온 이래 천천히 짐을 정리하고, 장 봐다가 밥을 지어 먹고,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자주 가던 마트의 품목과 배치는 달라진 게 없어서 익숙하게 장을 보고, 한 정거장 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트램을 타고,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서 방문을 열고, 사온 물건들을 바닥에 늘어 두고서 제 키보다 작은 냉장고에 가장 작은 것으로 고르느라 애쓴 물건들을 켜켜이 쌓았다. 정사각형의 좁은 나무 탁자에 상아색 식탁보를 깔고, 접시에 잡곡빵 두 조각과 토마토, 적양파, 오이를 썰어서 담고, 잘 익은 아보카도를 담고, 오목한 그릇에는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여러 과일과 뮤즐리, 꿀을 넣은 요거트를 만들었다. 언제든 빵에 발라 먹을 수 있도록 후무스와 루꼴라 바질 페스토까지 꺼내두면 근사한 아침 혹은 저녁 식사가 되지만, 영양 섭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길가에 핀 들꽃이나 강에서 카누나 말을 타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웠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혼자 먹는 아침은 아보카도에서 비누맛이 나는지 우유맛이 나는지, 커피에서 싸구려 방향제 맛이 나는지 한약 맛이 나는지 알 수가 없다. 혼자 보는 풍경은 감각이 되지 못하고 허공에 흩날릴 뿐이었다. 나를 위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록 함께 하면 좋을 것이 뻔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들이 곁에 없다는 감각만 선명해지는 것이다. 

             내가 먹는 아침을 너도 먹었으면 좋겠다. 르완다 원두로 내린 커피를 너도 마셨으면 좋겠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낯선 발음의 이 인사를 너도 들었으면 좋겠다. 고국과 확연히 다른 이곳 태양의 각도를 너도 봤으면 좋겠다. 카누를 타러 가자, 노가 물살을 가르는 감각이 좋으니까. 여름밤의 강변에서 술에 취해 한참을 웃고 노래를 부르는 내 친구들을 너도 봤으면 좋겠다. 새 해가 밝은 겨울밤의 광장에서 불꽃놀이에 넋이 나간 내 친구의 뒷모습을 너도 봤으면 좋겠다. 그저, 이 모든 아름다움을 네가 봤으면 좋겠다. 네가 좋으니까. 네가 여기에 있으면 행복하게 웃을게 아주 선하니까. 

             소중한 사람 부자. 보고 싶은 사람 부자. 좋은 사람 부자.

6/5/17

겨울

             안부를 묻습니다. 저는 두 계절과 열 다섯 절기를 보내고, 세 번째 계절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맞으러 나갈 용기는 없어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 숱한 낮과 밤을 적응하려 노력했으나,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무엇에 적응하려 한 것인지 그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보호색을 입으려 한 것인지. 새로운 껍데기에 나를 우겨 넣으려 한 것인지. 너와 다르지 않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더, 더욱 더 무장하려 한 것인지. 얕보이지 않기 위해 발걸음마저 단속하려 한 것인지. —라는 수취인 불명의 글이 노트 구석에 자필로 쓰여 있었다. 어떤 겨울은 봄이 와도 물러섬 없이 상흔으로 남아, 마음에 바람 부는 밤이면 어김 없이 죽자고, 제발 죽자고 덤빈다. 그러면 나는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두가 깨어나 생명력으로 가득한 그틈에 숨어 있으려고.

1/25/17

고독이라는 재앙

             쏭은, 그것은 마음에 바람이 부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마음에도 바람이 부는 줄 처음 알았다고 했다. 내게는 형용할 수 없는 중력이었다. 소리도, 형체도 없이 깊은 내면 부터 무너져 내렸다. 그 중력을 이겨내고 터져나온 숨이 그토록 무거운 줄 처음 알았다. 도도는 첫 해에 쉬이 잠들지 못해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했다. 와인을 마시며 고향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여전히 친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단어의 발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숨통이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적을 수도 없었다. 닮은 문자만 보아도 시야가 암전되었다. 그것은 공포이자 재앙이었으며, 언제나 불현듯 찾아왔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강가에서, 메뉴판을 들여다 보거나 잔돈을 세고 있을 때, 좋아하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눈보라가 나를 덮칠 때, 재앙은 어김 없이 불현듯 찾아왔다.

"고독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고독을 다시 구원하는 것들이" <외로운 도시, 올리비아 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