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15

여 름

              폴란드에 다녀왔다. 한 곳을 두 번 방문한다면, 그것은 분명 아이슬란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땅을 밟는 순간 ’돌아왔다’ 탄식하게 되는 곳은 그곳뿐이리라. 겨울도 아닌데 그 작고 낡은 아파트가, 삐걱임이, 나즈막히 드리운 빛이, 메마른 들꽃과 얼어 붙은 호수 위를 물들이는 석양이 그리워지는 때가 있어, 한 없이 부유하는 생의 마지막에 머무르고 싶다. 
              어쨋든 다시 방문한 폴란드는 여전히, 내 바람과 다르게 포근했다. 아이스크림이 맛있었고, 오래된 나무가 여기저기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으며, 우리를 어린 친구들이라 부르던 신부님은 여전히 산타 할아버지처럼 웃으시고, 언제나 내 기억 한 켠에서 ‘또 만나자’던 수녀님도 여전히 그 창살 너머에서 기쁘게 살고 계셨다. 언어가 아닌 온 존재로써 마주하는 기쁨을, 메아리치는 경이로움, 익숙함이 주는 평화를 보았다. 요리보고, 조리봐도, 좋아 할만한 게 전혀 없는 이 나라가 마음에 밟히는 이유를 이번에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또) 유디트 헤르만을 읽는다. 일상을 읊는 속도로 죽음을 얘기하는 이 리듬이 좋아서, 읽고 또 읽고.

But, Misha didn't die. Not during the night from Monday to Tuesday, nor the night from Tuesday to Wednesday; perhaps he would die Wednesday evening or later that night. Alice thought she had heard it said that most people die at night. The doctor weren't saying anything any more; they shrugged their shoulders and held out their empty, disinfected hands. There's nothing more we can do. Sorry. And so Alice, Maja, and Maja's child had to look for another place to stay. Another holiday apartment, because Misha couldn't die.

             먼지가 피어오르는 순간을, 해 질 무렵 시리게 빛나는 대기를,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웃을 때의 그 순수한 울림을, 좋은 사람들과의 찰나를 잡을 수가 없어서, 고요히 날리는 것을 조금 더 눈을 부릅 뜨고 바라 볼 뿐. 그 찬란함이 켜켜이 쌓여서 내가 되길 바랄 뿐.

"Live the light that always illuminates you."

2/25/15

안부인사

             어느덧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그리고 해도 바뀌었고, 세 번째 계절을 앞두고 있다.) 오늘은 꼭, 꼭 오랜만에 글을 써야지, 하고 빈 시간을 만들었지만, (그 이후에도 내일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리라 다짐했지만) 고소한 스콘을 먹으며 홍차를 한 번, 두 번, 세 번 우려 마시다 보니 어느새 자야할 시간이 (새해가) 되었다. (그동안 네 곽의 홍차와 함께, 여덟 개의 스콘을 소비했다.) 글쓰기가 너무 오랜만이라 전에는 내가 어떻게 글을 썼는지, 어떤 단어를 좋아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즐겨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금 슬프다. 
             11월에 써둔 일기가 있길래, 그 뒤를 적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그동안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삼키고 삼키다 말 아닌 순간만 남았다. 지난해의 끄트머리는 그랬다. 나는 여전히 해 질 무렵의 향수를 좋아하지만, 동틀 무렵의 설레임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고요한 밤을 좋아하지만, 창 밖의 모든 것이 재잘거리는 듯한 아침을 좋아하게 되었다. 커피 보다는 홍차, 세련된 별다방 보다는 촌스러운 동네 다방, 그보다는 그냥 방, 쓰기 보다는 읽기. 매력적인 책은 많고 나는 느리다. 
             요즘도 문득, 눈을 감으면, 바람 부는 항구에 서있을 때가, 석양으로 물든 호수를 바라볼 때가, 백조 울음소리가 들릴 때가, 그래서 몹시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의 귀여운 레이캬비크가.) 원하는 곳으로 떠나는 삶 보다는 내가 사는 곳이 원하는 곳이 되기를 바라지만, 북극권에 위치한 땅의 모습을 보다 보면 또 다시 모락모락 피어나는 북극의 꿈. 


             그러니 내 모습을 그려봐. 다락방 창가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앉아서 풀밭과 목수네 마당을 원근측정기로 들여다볼 때, 사람들은 마당에서 커피를 끓이려고 불을 지피고, 제일 첫 번째 일꾼이 어슬렁대는 광경을 말이야. 검은 연기를 내뿜는 굴뚝들 사이로, 기와를 얹은 지방 위로 흰 비둘기 떼가 날아다니지. 그 너머로 미묘하고 엷고 푸르고 편평한 풀밭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찌푸린 하늘은 코로와 반 호이언의 그림처럼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해. <'고흐의 편지'중에서, 빈센트 반 고흐>

5/17/14

<경제 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주의자, 꿈을 꾸고 있는 사람, 낭만주의자, 상아탑 속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고, 현상을 그대로 계속할 것을 말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될수록 무시하고 목전의 돈벌이에 전념한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현실주의자',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지구라는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는 우리들은 빙산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선내 방송에서 몇번이나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힐만큼 들어왔습니다. 그 말이 진부할 정도로, 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또 그 얘기?"라고 합니다. 마침내 빙산에 부딪힐 거라는 것은 알고 있더라도, 그 빙산은 아직 보이지 않아서 현실적인 얘기라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귀에는 들어와도 그것은 아직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있는 것은 타이타닉호라는 배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현실은 '타이타닉호'라는 배뿐입니다. 타이타닉호 속에는 판에 박은 다양한 일상사가 있습니다. 모두 각자 일상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계속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입니다. 누군가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비상식, 비현실주의적입니다. 현실주의적인 경제학자가 타이타닉호에 "전속력으로"라는 명령을 하려고 합니다. "속력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타이타닉호의 논리, '타이타닉 현실주의'입니다. 그것이 어째서 논리적이고 현실주의적으로 들리는가. 도무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만일 타이타닉호가 전세계라면, 배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논리적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이타닉호의 바깥에는 바다가 있고 빙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경제의 바깥에는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